다중세계 해석이 실존주의 철학에 미친 영향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든 이미 정해진 길을 걷고 있을까?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우리는 직업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며, 때로는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길이 다른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다면, 우리의 결정은 정말로 의미 있는 것일까?
다중세계 해석(MWI)은 모든 가능한 선택이 실제로 다른 세계에서 실현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A라는 선택을 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그것이 실현되지만, B라는 선택을 했다면 존재할 또 다른 세계에서는 그것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양자역학적 해석이지만, 실존주의 철학에서도 깊이 있는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이며, 자신의 선택이 곧 존재의 의미를 만든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다중세계 해석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내린 선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과 존재의 의미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다중세계 해석이 실존주의 철학에 미친 영향을 탐구하고, 선택과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본다.
다중세계 해석과 실존주의 철학의 연결점
1. 사르트르의 ‘선택’과 다중세계 해석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인간이 본질 없이 태어나며,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간다고 주장했다. 그는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고 말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존재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다중세계 해석에 따르면, 우리가 내린 모든 선택이 각각 다른 세계에서 실현된다. 그렇다면, 선택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규정한다는 사르트르의 주장도 상대화될 수 있다. 즉, 우리가 내린 선택은 단 하나의 운명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특정 선택이 곧 우리의 본질을 결정한다고 단정하기 어려워진다.
2. 키르케고르의 불안과 다중세계 해석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인간이 선택을 앞두고 느끼는 불안을 강조했다. 그는 선택의 순간에서 인간이 자유를 느끼는 동시에 두려움을 경험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다중세계 해석이 사실이라면, 선택을 잘못할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도 또 다른 현실에서 실현된다면, 한 개인의 선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는 실존주의가 강조하는 ‘결단의 중요성’을 흔들 수 있는 개념이다.
3. 니체의 ‘영원 회귀’와 다중세계 해석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영원 회귀(eternal recurrence)’ 개념을 통해,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내리는 모든 선택이 무한히 반복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중세계 해석과 비교했을 때, 영원 회귀와 유사한 점이 존재한다. 니체가 주장한 ‘반복되는 삶’과 다중세계 해석에서의 ‘무한한 가능성’은 본질적으로 비슷한 구조를 지닌다. 다만, 다중세계 해석에서는 동일한 선택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이 각각의 우주에서 실현된다는 차이가 있다.
4. 실존주의적 자유의 의미는 어떻게 변할까?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지만, 다중세계 해석이 맞다면 한 사람의 삶은 단 하나의 경로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는 자유의 의미를 재정의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예술가가 될지 과학자가 될지 고민한다고 가정하자. 만약 다중세계 해석이 사실이라면, 그는 예술가가 된 세계도, 과학자가 된 세계도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한 가지 가능성을 실현한 것일 뿐일까? 이는 실존주의적 자유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 존재를 정의할 수 있을까?
다중세계 해석과 실존주의 철학의 만남은 ‘선택’과 ‘존재’의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명한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창조한다고 보지만, 다중세계 해석은 모든 선택이 다른 우주에서 실현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자유로운 존재일까?
어쩌면 다중세계 해석은 실존주의 철학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하는 개념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각 우주에서 다른 선택을 하면서도, 그 순간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즉, 선택의 무게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가능성들을 책임지고 살아가야 한다.
결국, 다중세계 해석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삶을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실존주의 철학이 강조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변함없이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으며, 다중세계 해석이 이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